김경순 수필가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학생들의 수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에선지 지난달부터 점차적으로 강의가 시작되고 있다. 학생들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까지 설렜다. 내가 맡은 강의 중에는 다문화 검정고시 수업이 있다. 그런데 지난 학기부터는 일반 성인들도 수업에 참여하고 있어 분위기가 한결 화기애애하다. 검정 수업이다 보니 자칫 분위기가 무거울 수도 있어 학생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묘안이 필요했다.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베트남, 캄보디아, 중국에서 온 이주여성들이다. 지난해에는 필리핀 이주여성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내가 수업하는 과목은 국어와 사회다. 수업과 연계가 되면서도 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묘안을 냈다. 그것은 동물의 소리 흉내 내기나 동물 이름 말하기, 또 어떤 때는 자신의 나라에서 맛있다는 음식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내 묘안은 대 성공이었다. 사실 어휘력 향상에 이만한 놀이도 없지 싶다. 자신의 나라 동물을 말하면서 고국을 알리기도 하고 다른 나라의 색다른 동물이나 음식을 알게 되는 이점이 있다. 신기하게도 똑 같은 동물임에도 울음소리는 각기 달랐다.

“찍찍찍~”

순간, 웃음소리로 교실이 소란스러워 졌다. 바로 베트남 학생의 새소리 흉 내 때문이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 학생을 위해 나는 한국의 어르신 학생에게 쥐 소리를 내 보라고 했다.

“찍찍찍~”

그제야 그 학생은 얼굴을 붉히고는 웃는 것이었다. 같은 동물임에도 나라별로 그 울음소리는 다르게 표현 된다. 물론 동물은 같은 울음소리를 낼 것이다. 하지만 나라마다 언어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표현이 다를 수밖에 없다. 언어는 그 사회 구성원들 간의 약속이다. 한 개인이 마음대로 바꿀 수도 정할 수도 없다.

스위스의 페터 빅셀의 단편소설 <책상은 책상이다>는 언어의 사회성을 무시했을 때 일어 날 수 있는 극한 상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주인공은 특별하지 않은 그저 나이 많은 남자다. 그는 무료함에 지쳐 세상이 변하길 바랐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사물의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침대를 사진이라고 부르고, 책상은 양탄자로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의 이름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다. 사는 것이 즐거워 졌지만 그는 이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렵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조차도 예전의 언어를 잊어버려 사물의 이름을 붙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람들을 만나지도 못한 채 외톨이가 되었다. 결국 스스로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소외를 시킨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언어의 사회성을 지키지 않은 자신에게 내린 벌이 되고 말았다.

참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하는 사회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는 것은 축복일 것이다. 요즘 나는 강의를 하면서 때때로 매 순간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누군가를 위해 보탬이 되고 그로인해 그 사람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선생’이란 내 직업이 이리 소중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언어를 가르쳐 줄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큰 기쁨일 것이다.

멋쩍어 하는 베트남 학생에게 나는 “괜찮습니다. ‘찍찍찍’은 새 소리도 맞고, 쥐 소리도 맞습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내 말에 어르신 학생들도 고개를 주억거리시며 맞장구를 쳐 주셨다. 각 나라의 문화는 틀린 게 아니고 다르다는 것을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시나브로 알아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얼굴 표정과 웃음소리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부디 다문화 사람들에게 우리들의 작은 노력이 외롭고 힘든 타국살이에 위로가 되고 살아갈 힘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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